정부가 공공기관 기능개편의 일환으로 부산항만공사(BPA), 인천항만공사(IPA), 울산항만공사(UPA), 여수광양항만공사(YGPA)를 하나로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가운데, 전국 주요 항만도시 시민사회와 정치권이 국회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통합 추진 중단을 강력 촉구했다.
부산·울산·경남·여수광양·인천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20일 국회 소통관에서 '전국 4개 항만공사 통합 추진 중단 및 자율성 강화 촉구'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곽규택 국민의힘 의원과 허종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함께 참석했으며, 부산·인천·울산·여수광양 등 5개 지역 약 300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정부의 항만공사 통합 방안에 공동 대응에 나섰다.
이번 기자회견은 지난달 4개 항만공사 노동조합의 공동 반대 성명에 이어 시민사회와 정치권까지 반대 전선이 확대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기능과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4개 항만도시가 한목소리를 낸 것은 이례적인 일로, 항만공사 통합이 단순한 공공기관 구조조정이 아니라 국가 항만정책과 지역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칠 중대한 사안이라는 인식이 반영됐다는 평가다.
◆ "국가균형발전 정책과 정면 충돌"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항만공사 통합이 국가균형발전 전략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에서 "정부는 '5극 3특' 국가균형발전 전략을 추진하면서도 정작 지역의 핵심 성장 거점인 항만을 중앙집중형으로 통합하려 하고 있다"며 "이는 지역의 자율성과 책임을 강화하겠다는 국가균형발전 정책과 모순되는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부산은 글로벌 환적항과 북극항로 거점, 인천은 수도권 국제물류 관문, 울산은 세계적인 에너지 물류 허브, 여수광양은 국가 기간산업과 연계된 산업물류 중심항으로 발전해야 한다"며 "역할과 경쟁 구조가 전혀 다른 항만을 하나의 조직으로 묶는 것은 국가 해양전략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세계 어디에도 중앙집중형 통합 사례 없다"
참석자들은 정부의 효율화 논리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박했다.
이들은 네덜란드 로테르담항, 독일 함부르크항, 미국 로스앤젤레스항과 롱비치항, 싱가포르항 등을 사례로 제시하며 "세계 주요 항만은 통합이 아니라 항만별 자율성과 전문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세계 어느 나라도 국가 주요 항만을 하나의 중앙집중형 조직으로 통합 운영하지 않는다"며 "글로벌 항만 경쟁력은 중앙집권적 통합이 아니라 지역의 자율성과 전문성, 신속한 의사결정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 "북극항로 시대 역행하는 정책"
특히 정부가 북극항로 개척과 해양수도 정책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항만공사 통합을 검토하는 것은 정책적 모순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참석자들은 "북극항로 시대를 앞두고 부산항은 글로벌 환적 허브로, 인천항은 대중국 교역 중심항으로, 울산항은 에너지 안보 거점으로, 여수광양항은 산업 공급망 핵심항만으로 각각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며 "통합은 이러한 국가 해양전략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해양수산부가 추진 중인 해수부 부산 이전과 북극항로 개척, 부산 글로벌 해양허브 육성 전략과도 상충된다는 것이 항만업계의 시각이다. 북극항로 시대에는 항만별 신속한 투자와 영업 전략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중앙집중형 의사결정 체계는 오히려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다.
◆ "통합 대신 협의체 구성해야"
이들은 통합이 아닌 협력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기자회견문에서는 ▲항만공사의 자율성과 독립성 확대 ▲항만별 조직·인사·투자 권한 강화 ▲북극항로 대응과 디지털항만 구축, 탄소중립 항만 조성 등 공동 과제는 '전국 항만공사 협의체'를 통한 협력 ▲주식회사형 공기업 도입 등 전문경영체계 강화 등을 정부에 요구했다.
또 지방정부와 지역사회의 참여를 확대하는 항만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며 "항만공사 통합 추진이 중단될 때까지 5개 지역이 공동 대응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 해운업계 "해수부가 마지막 방파제 돼야"
해운·항만업계에서는 항만공사가 일반 공기업과 달리 항만별 책임경영과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통합 논의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부산·인천·울산·여수광양은 화물 구조와 고객, 산업 생태계, 경쟁 상대가 모두 다른 'DNA가 다른 항만'"이라며 "기관 숫자를 줄이기 위한 획일적 통합보다 항만별 책임경영과 투자 자율성을 확대하는 것이 세계 항만과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대한민국 항만 경쟁력을 책임지는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가 재정당국의 공공기관 통합 논리에 끌려가기보다 국가 항만 경쟁력을 지키는 마지막 방파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