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 봉쇄 사태가 전 세계 해운산업의 위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선박 사고나 화재, 기관고장보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해운업계 최대 위험요인으로 부상하면서 글로벌 공급망이 효율성 중심에서 회복탄력성(Resilience)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독일 보험그룹 알리안츠 커머셜(Allianz Commercial)이 최근 발표한 ‘해상 안전 및 해운 리뷰 2026(Safety and Shipping Review 2026)’에 따르면, 미국·이스라엘·이란 간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페르시아만에 약 1,250억달러 규모의 선박과 화물이 발이 묶인 것으로 추산됐다.
알리안츠 리서치는 지난 6월 15일 기준 약 1,150척의 상선이 페르시아만에서 운항을 재개하지 못한 채 대기 중이었으며, 총 선복량은 2,900만GT, 선원 수는 약 2만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토마스 릴룬드 알리안츠 커머셜 CEO는 “중동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최근 수년간 이어진 글로벌 공급망 충격의 최신 사례일 뿐”이라며 “지정학과 회복탄력성, 효율성의 균형이 해운산업의 핵심 과제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보고서는 특히 지정학적 위험을 향후 선주와 화주들이 직면할 가장 큰 리스크로 꼽았다.
관세전쟁과 지역 분쟁, 제재와 규제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공급망 설계 기준이 비용 최소화에서 안정성 확보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리안츠 커머셜 해양리스크 컨설팅 총괄인 라훌 칸나 선장은 “우리는 이제 불확실성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시대에 진입했다”며 “정시 공급망(Just-in-Time)에서 대비형 공급망(Just-in-Case)으로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진단했다.
실제 호르무즈 해협은 세계 원유 교역량의 20~25%가 통과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전쟁 이전 하루 100~140척이 통항했지만 봉쇄 기간에는 2~4척 수준까지 급감했다.
칸나 총괄은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에도 호르무즈 해협은 완전히 폐쇄되지 않았다”며 “이번 사태는 역사상 처음으로 해협이 사실상 봉쇄된 사례”라고 평가했다.
보험보다 더 큰 문제는 ‘전쟁 해역 운항’
보고서는 보험시장 자체는 전쟁 기간에도 선박과 화물에 대한 담보를 유지했지만, 실제 선주들에게 더 큰 부담은 보험료가 아니라 전쟁지역에서 선박과 선원을 운영하는 위험이었다고 분석했다.
국제해사기구(IMO)에 따르면 지난 6월 11일까지 46척의 상선이 피해를 입었으며, 14명의 선원이 목숨을 잃었다.
보험 손실도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알리안츠는 이미 이번 전쟁과 관련된 대형 사고 접수를 받기 시작했으며, 장기간 억류된 선박의 화물 변질, 선체 오염(Biofouling), 정비 지연 등에 따른 추가 손실도 예상하고 있다.
특히 초대형 선박 증가로 공동해손(General Average) 규모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도 새로운 위험요인으로 지목됐다.
보고서는 전기차 수천 대를 적재한 자동차운반선의 경우 공동해손 분담금이 1억달러를 넘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사고는 줄었지만 위험은 더 커졌다
흥미로운 점은 해운산업의 안전성 자체는 오히려 개선되고 있다는 점이다.
알리안츠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해양사고는 2,818건으로 전년(3,353건) 대비 16% 감소했다.
최근 5년간 전손 사고는 350건으로 직전 5년(555건) 대비 37% 줄었으며, 지난해 전손 사고는 43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기관고장과 기계결함은 여전히 전체 사고의 절반 이상인 1,505건을 차지했다. 선박 화재 역시 최근 10년 중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을 기록했으며, 리튬이온 배터리 화재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평균 선령이 23년에 달하는 노후 선박 증가도 잠재적 위험으로 꼽혔다.
보고서는 “사고 발생 건수는 감소하고 있지만 사고 한 건당 손실 규모는 커지고 있다”며 “보험 가입만으로는 부족하며 회복탄력성과 위험관리 체계 구축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호르무즈 사태가 단순한 중동 지역 분쟁을 넘어 글로벌 해운산업이 새로운 질서(New Maritime Order)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전쟁위험보험, 공급망 다변화, 북극항로와 같은 대체 물류망 확보가 향후 해운·물류 기업들의 핵심 경영 과제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