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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탕의 여성 때밀이보다 더 절실한 것
남탕의 여성 때밀이보다 더 절실한 것
  • 해사신문
  • 승인 2012.04.1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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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海 유희민 작가, cupscap@naver.com
세상이 너무 급하게 변하는 탓에 어느 한 분야를 깊숙이 연구해서 일가(一家)를 이루려는 특별한 전문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바뀌는 시대다. 전문가 또는 어떤 한 분야에 집착하다 보면 다른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남들 다 쓰는 스마트 폰은 복잡해서 사용하기 불편하다거나 돈을 송금할 때 꼭 은행에 가지 않으면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비록 한 분야에서 자신이 전문가나 특별한 장인이라는 타이틀을 빼면 무식한(?) 인사가 되어버리는 시대다.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는 새로운 지적 용어들을 모두 공부하고 섭렵하면서 또 다른 한 분야에 집착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닌 모양이다.

무섭게 세상에 쏟아지는 것은 세상의 신지식들만은 아니다. 세상이 너무 급하게 변하는 탓에 살아가는 자체가 혼란스러울 정도다. 한때 미국에서도 유니섹스(兩性)라고 해서 남녀의 구분이 모호해 때가 있었다. 여자가 청바지를 입고 운전을 할 때만 해도 그저 여자도 일할 수 있구나 했었다. 여성이 치마를 벗었다는 그 상징적인 상황을 남성들은 새로운 노예의 탄생처럼 즐겼다. 그랬다가 다시 여자가 치마를 입었다.

그것도 허벅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미니스커트였다. 메리 퀀트(Marry Quant)라는 영국의 디자이너가 최초라고 한다. 자신이 만든 짧은 치마를 좋아하는 차 이름을 붙여 미니(Mini)라고 부른 게 최초라고 기록되어 있다.

역설적이지만 유명한 남성 디자이너들이 앞다투어 미니스커트를 만들어 내면서, 비겁하게도 남성들은 일 잘하는 바지 입은 여성들보다는 치마 입는 여성이 되기를 원했다. 급기야 여성들이 개성을 발산하면서 서서히 남성의 눈높이를 자신의 허리 아래로 끌어내려 버린 것이다. 드디어 여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때가 1955년이었다. 그렇게 오래지 않다. 그러나 그 짧은 세월 동안 여성은 당당한 동성(同性)의 지위를 확보해 버렸다.

여성파워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현대의 역사를 양분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중국의 모택동이 문화혁명 때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지구의 반은 여자다.’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다분히 꼼수가 있었다. 많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여성에게도 총을 들 수 있게 해야 했다.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도 여전히 여성에게 중장비를 몰게 한다거나 남성과 같은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유효해서, 중국은 남성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지구 상의 가장 광범위한 남녀평등 사회가 되어 있다.

여성의 영향력은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 정치를 예로 들어보자, 박근혜, 한명숙, 이정희, 정치하는 정당의 당 대표가 모두 여성이다. 어디 대한민국만 그런 건 아니다. 현재 영국총리의 이름은 몰라도 철의 여인이라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모두 기억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는 미국의 힐러리 국무장관, 미얀마 민주주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룰라의 뒤를 이어 브라질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지우마 호제프……. 이런 젠장, 머리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유명 여성인사들 때문에 필자가 갑자기 기가 죽을 판이다.

백번 양보해서, 그래 여성들의 지위도 인정해 주자. 솔직히 남성들보다 더 섬세하고 더 잘하는 구석이 훨씬 많은 점도 있으니까 도리가 없다. 여자가 요리하는 건 당연해 보이지만 남자가 더 요리 잘하는 사람이 많다고, 꼴에 남자다운 자존심을 내세우기는 하지만 그뿐이다. 다른 분야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성은 좀 달라 보인다. 어디든 치고 들어온다. 금녀의 구역에 살짝 발을 담갔다 싶으면 여지없이 그 분야는 혼성(混性)되어서 누구나 하는 업종이 되어버린다.

목욕탕의 남탕에는 남성 때밀이(요새는 피부관리사로 부른다.)가 있어야 하지만, 언젠가 당당히 그들이 남탕에 들어와 ‘요새도 무식하게 남자한테 때를 밀어?’ 하고 덤벼들 날이 머지않을 것이다. 가설이지만 어머니 같은 그 여성이 구석구석 섬세한 손길로 피부를 관리해 준다면 딱히 그 자체가 부조화(不調和)로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여탕에 남자 때밀이가 들어가서 일한다면 그건 부조화가 맞다.

시쳇말로 여성들이 다 해먹는 시대다. 남성들 처지에서 보면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필자가 글을 쓰면서, 그래도 아직은 남자의 텃밭인 게 있었다. 바다였다. 더러 여성 선원이 있기는 하지만 러시아처럼 사회주의 국가나 가능했고, 그 외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없었다. 시리즈로 엮어 나왔던 유명한 영화 조니 뎁 주연의 ‘캐리비안의 해적’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엘리자베스 스완 역할의 키이라 나이틀리 정도가 고작이다. 육군사관학교에도 여학생이 당당하게 입학하는 세상이다. 여성들이 국가를 지키겠다는 당찬 포부다.

여성들이 국가도 지켜주는 마당에 무언들 못할까? 그럼 바다는? 여성이 바다를 지킨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분야는 제발 와서 좀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세상에 쏟아지는 지식이 넘쳐나서 한 분야에 전문가나 장인이 사라지더라도 이 분야만큼은 여성의 참여를 원한다. 남탕에 여성 때밀이도 좋지만, 여성들이여 바다도 관리할 게 많은 곳이다. 오라. 바다로. 와서 제발 그대들의 섬세한 손길로 바다를 관리해 주시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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