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24-04-26 17:12 (금)
목포해양대, 제3회 민학관군 합동 세미나 개최
목포해양대, 제3회 민학관군 합동 세미나 개최
  • 해양교육문화팀
  • 승인 2021.12.07 07: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12월 3일에 정유재란 시기 이충무공과 조선 수군의 행적을 재조명하기 위한 제3회 민·학·관·군 합동심포지움이 국립목포해양대학교(총장 한원희) 대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제한된 인원만 참석한 가운데 전국으로 생중계된 합동심포지움 논문 발표에 앞서 한원희 대학 총장의 환영사에 이어 김영록 도지사와 제 3함대사령관 황선우 제독은 영상 축사를 통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혼을 되새기고, 관내 민학관군이 상호 협조하여 관내에 산재해 있는 이충무공 유형·무형의 자산을 잘 관리하고 연구·발전시켜 자랑스런 문화자산으로 가꾸자고 강조했다.

이날  순천향대학교 이순신 연구소장 제장명 박사, 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 김주식 박사를 비롯한 이순신 전문가들이 모여 주제발표와 열띤 토론을 벌였다. 

특히 이날 목포해양대학교 해군사관학부 고광섭 교수는 ‘이순신의  선조의 출전 명령 거부설’ 의 진원지인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자 기사를 정면으로 뒤집는 논문 발표와 함께 결정적인 사료를  발표 현장에서 공개해 큰 화제가 되었다. ‘오리선생문집’에 수록된 이순신의 지휘권자였던 체찰사 이원익이 선조에게 보고한 1596년 12월부터 1597년 1월까지의 장계에 실린 내용을 공개한 것이다.  
 
고 교수의 발표 및 자료 공개에 따르면 1596년 12월부터 1597년 1월 사이 왜군이 침공하기 직전까지도 이순신의 직속 상관인 이원익은 수군 통제사 이순신과 수시로 소통하며, 부산해역으로 출전하겠다는  이순신의 작전계획을  수 차례 장계에 실어 선조에게 보고했다고 했다.   

이날 고 교수가 공개한 이원익의 장계 중  왜군 수장 가토(가등청정)가 부산해역으로 침공하던 첫 날인 1597년 1월 12일 이원익의 장계 내용은 이순신의 출전 거부설의 핵심 근거인  선조수정실록 2월 1일자 기록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말해준다고 했다. 

이를테면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기사에는 ‘순신은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을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 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거행하지 않았다.’ 고 하며 국왕의 출전 명령을 전달 받고도 이순신이  출전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가 오늘날까지도 이순신의 출전 거부설 또는 항명설의 근거가 되어왔다는 것이다. 

반면에  고 교수가 공개한 1597년 1월 12일 이원익의 장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적의 배는 매번 동풍을 타고 오는데 가등청정(가토)이 만일 동남풍으로 말미암아 옛 보루에 정박한다면 우리나라의 배가 비록 거제의 동쪽 항구에 있다 하더라도 해로가 가깝지 않고 바람도 거슬리므로 형세가 미칠 수 없으니, 부득이 가덕도의 동쪽 바다에 나아가 정박하여 장소포에 진을 치기도 하고 혹은 다대포의 앞바다에 진을 치기도 하면서 기회를 보아 맞아 싸운다는 것이니 이순신의 생각이 이와 같았습니다.

신(이원익)은 여러 둔진의 왜적들이 가까이 다가와 죽 벌려있으면 출입하고 진퇴하기가 불편한 것을 염려하였더니, 이순신은 ‘지금 거사하려고 하면 형편상 몰래 다니거나 가만히 숨어 있을 수 없다. 언덕에 있는 적이 배를 타면 우리는 그들을 공격할 수 있고 언덕에 있으면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 기세가 없는 것이니, 형세가 외로운 적을 피할 이치가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즉  위의 이원익의 장계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왜군 침공 시점까지도 가덕도와 다대포로 출전하겠다는 이순신의  작전계획이 분명하게 확인되고,  둘째, 이순신의 작전계획에 대하여 직속 상관인 이원익마저도 적의 방해 및 거부 작전을 우려했음에도 이순신은 부산해역으로 출전해야한다는  강력한 결의를 보여준 점이다.  

고 교수는 정유재란 발발 직전 이순신의 직속 상관 이원익이  국왕에게 보고한 장계에 수록된 이순신의 부산해역으로의 출전 계획이나 강력한 출전의지는 이순신 사후 60여년 후인 1657년 경 완성된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기록에는 완전히 상반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어떤 경로나 이유에서 정 반대의 사실이 이순신 사후  완성된 선조수정실록에 왜곡돼어 기록되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기록을 더 이상 정상적인 사료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고 교수는 오랜 세월 왜곡된 역사 자료의 반복 인용으로 오늘날까지도 마치 이순신이 선조의 출전 명령을 거부하며 항명했다고 인식되어 온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또  이제부터라도   수 백년 동안 왜곡되어 내려온 이순신의 역사를 바로잡고 이순신의 항명죄 누명도 벗겨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목포해양대학교 관계자는 앞으로도  정례적인 민·학·관·군 합동 학술대회를 통해  해양안보·전략 및  해양정책·역사·문화 발전 등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