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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세 현역으로 뛰고 있는 왕상은 회장을 만나다
94세 현역으로 뛰고 있는 왕상은 회장을 만나다
  • 윤여상
  • 승인 2013.08.26 0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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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도경영'을"
경험 많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에게 지도와 조언을 받는 것을 영어로 '멘토링(mentoring)'이라고 한다. 이끌어주는 스승이 '멘토(mentor)'이고, 멘토에게 배움을 얻어 보다 향상되려는 자가 '멘티(mentee)'다. 우리말로는 멘토를 보다 존경심을 넣어 높여서 '정신적인 지주'라고도 부른다.

얼마전 만난 협성해운 왕상은 회장은 불쑥 이러한 멘토링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해운계의 멘토로, 그리고 정신적인 지주로 항상 그는 우리 곁에 있어왔다. 왕 회장은 1920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아흔넷(94). 그는 나아가 이제까지 해운업계의 거물로 불리우는 사람들의 멘토 역할을 했었고,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도 존경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 해운업의 산증인= 왕 회장이 해운업계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회자되고 있는 것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거르지 않고 있는 출근길과 지금도 필드에서 드라이버를 휘두르는 열정도 있겠지만, 그가 걸어온 삶 자체가 '해운산업의 역사이고 이를 목도한 산증인'이라는데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왕 회장은 전쟁 중인 1950년대 초반 해운업에 뛰어들었다. 젊은 시절 무역업계에서 일을 해왔던 왕 회장은 두 차례의 국회의원을 지냈던 정치생활을 제외하고는 지난 60여년 동안 해운업에만 종사해온 사람이다. 지금도 현역에서 일하고 있으니 해운업 종사자 중에서 앞으로 오랫동안 이 기록을 깨기는 어려울 듯하다.

장구한 역사속에서 그가 해운업이라는 외길을 고집하면서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왕 회장이 해운업을 영위하면서 사업이 지속적으로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무역을 배웠고, 전쟁 중에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전쟁물자를 대상으로 선박대리점을 한 것이 그에게는 기회였다. "돈이 잘 벌리더라"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권력에 의해 사업을 접어야 하기도 했고, 해운산업합리화정책이라는 명목으로 통폐합에 의한 손해도 감수해야만 했다. 왕 회장은 "많은 손실을 봤다. 하지만 원칙을 가지고 경영을 했다"고 말했다. 오랜 기간 해운업체를 이끌어온 노하우에 대해 "그런게 있느냐. 내가 생각하는 '정도경영'를 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조금 잘된다고 부화뇌동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그는 사업에서 손을 놓을 때까지 이 원칙은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량화주 경제민주화 문제 많아= 왕 회장은 최근의 해운업이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은 '원칙과 정도'가 바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해운업계의 멘토로서 반드시 새겨들을 말이다. 흐름에 따라 사업을 영위하는 것이 중요한데,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다보니 이러한 위기가 찾아올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왕 회장은 "대량화주인 공기업이 일부 해운업체만을 대상으로 물량을 배정하는 등 문제가 많다"면서 "과연 공기업이 경제민주화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해양수산부의 부활과 관련해서는 "사실 원로로서 많은 걱정을 했었지만, 여성 장관이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후한 점수를 주었다. 그는 "앞으로도 해수부의 역할에 상당한 기대를 하고 있다"며 기대감을 표하기도 했다. 힘있는 부처로서 업계의 고충을 듣고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부처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로 들었다.

해운업을 영위하면서 왕 회장은 해운업과 관련있는 재미있는 기록도 여럿 남겼다. 후일에 재미있는 기록으로 기사에 쓰여지고 있지만 하나하나 걸은 길이 모두 '첫걸음'을 내딛는 험난한 길이었다. 결과적으로 권력 앞에 무너졌지만 부관훼리를 만들어 선박을 건조해 우리나라에 카페리를 처음 도입한 것도 그였고, 부산항의 기반을 다진 부두관리운영공사의 초창기 멤버로 활동하면서 전세계 5위권의 항만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다진 것도 그였다. 왕 회장은 "당시에 대형 여객선에 대한 인식과 컨테이너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왕 회장은 1962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선원송출을 하면서 대한민국의 선원관리의 포문을 연 것으로도 유명하다. 업계의 한 인사는 왕 회장과의 인터뷰에 동석해 "당시에 왕 회장의 회사에서 첫 송출을 나가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선원송출업이 대한민국의 경제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는 자세한 언급이 필요가 없을 정도다. 선원들의 벌어들인 외화로 우리가 후진국의 늪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왕 회장은 또한 '국적취득 조건부 나용선(BBCHP)'을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말그대로 해운업을 비롯한 해양계에서 '개척자', '대부', '선각자'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그에게 붙어다니는 것이 그에게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유다.

◇해운업 이외에도 많은 봉사에 앞장= 해운업계에서 왕 회장의 공적은 지면 관계상 이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 같다. 왕 회장이 해운업계 뿐만 아니라 정재계 등지에서 두루두루 존경을 받고 있는 이유도 적시할 필요가 크기 때문이다. 왕 회장은 해운업을 평생 동안 영위하면서도 지역경제 활성화는 물론 사회복지사업, 그리고 국제교류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일을 했고 그 성과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고 있다.

'삼일절', '바다의날', '제헌절' 등 각종 기념일이 있으면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왕 회장은 "오래 살다보니 상도 많이 받고, 만나자는 언론매체도 많더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의 겸손일 뿐 내용은 그렇치가 않다. 앞서 언급한 그러한 기념일이 되면 왕 회장에 대한 기억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왕 회장은 여러 나라의 영사로서 각국의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형식적인 상을 수여 받은 것이 아니다. 그에 걸맞는 역할을 그가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교가에서는 그를 '민간외교관 왕회장'으로 칭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는 지난 1989년부터 맡고 있는 한미친선회 회장직을 현재까지도 맡고 있다. 그쪽 사람들은 왕 회장이 한미친선회 업무를 얼마나 꼼꼼히 챙기는지 알고 있다. 회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왕 회장 만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왕 회장은 "나이를 생각하면 적임자가 나오면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직도 업무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사업을 하면서 왕 회장은 우리 사회에 대한 관심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미래의 원동력인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지금도 이사장을 지내고 있는 부산에 있는 남광사회복지원을 챙기며 복지사업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왕 회장은 사회복지사업에 대해 "대를 이어가면서도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결코 사회적인 책무를 소홀하게 하지 않고 기업을 꾸려나가겠다는 노 기업인의 의지의 표현이다.

◇부산상공인 특별공로상 헌정= 해운업계의 거목으로서 왕 회장은 업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부산사람으로서 해양수도 부산이 있기까지 공헌을 살펴보면 해운업에 끼친 공헌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마도 해운업계의 존경심에 비해서 지역에서 차지하는 무게감이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다는 것을 부산지역의 경제계는 모두들 알고 있다.

지난달 부산상공회의소 창립 제124주년 기념식에서 부산상의 조성제 회장은 상의 역사상 처음으로 '특별공로상'을 노 기업인에게 수여했다. "존경을 담아서 드린다"면서 왕 회장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차렸다. 부산지역 경제계는 물론 부산시장, 교육감 등 모든 인사들이 왕 회장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지난 2009년 세계해양포럼에서 대한민국해양대상의 영예를 차지했을 때 보냈던 박수와 다르지 않았다.

왕 회장은 이 자리에서 "이런 과분한 상을 수상하게 돼 영광스럽다"면서 "앞으로도 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 내내 부산지역에 쏟은 자신의 열정을 기억해내면서 아쉬움과 희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상의는 "왕 회장이 상공회의소 부회장과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상의 안정화와 지역경제에 기여한 공로가 매우 크다"면서 "지역 경제인의 존경의 마음을 담아 공로상을 수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왕 회장은 상의 부회장 재임 기간 중에 부산은행과 항도투자금융 설립에도 앞장서는 등 부산경제의 기반을 강화했다. 특히 창업주들인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과 엘지의 고 구인회 회장 등과 함께 부산탑을 세우는데 일조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왕 회장이 40대 때의 일이었다.

◇아직도 골프 100타 안쪽...건강 자신있어= 왕 회장의 행보가 과연 언제까지 펼쳐질지도 후배들에게는 관심사다. 당연히 그의 건강이 어떤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언론에서도 왕 회장의 건강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을 자주 본다. 한마디로 기자가 본 왕 회장을 묘사해본다. 시상식에 오를 때 주변에서 돕고자 나온다. 왕 회장은 뿌리치지 않는다. '몸이 조금 불편하신가'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왕 회장과의 인터뷰에서 궁금증이 사라진다. 그는 아직도 100타 안쪽을 치는 골퍼다. 그것도 부산에 자주 내려와서 정기적으로 골프를 즐긴다고 한다. 먹는 음식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손수 가꾼 채소와 소식을 즐긴다는 이야기를 했다. 왕 회장은 또한 장수한 부모를 모셔 유전적으로도 탁월하다.

왕 회장은 "앞으로 해운업은 물론이고 할 일이 많다"면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보다 많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해운업계에서는 따라올래야 따라갈 수 없는 경력을 가진 '해운계의 대부', 집권여당에서 서열 3위의 중앙위의장을 지내고 국회의원도 두 번이나 해 본 '정치인', 국제무대에서 왕성하게 교류를 펼치는 '민간외교관', 아흔넷의 왕 회장이 다음 무슨 일을 할지 궁금증도 일고 기대는 더욱 크다. 지금처럼 왕성하고 건강한 멘토와 정신적 지주로 오랫 동안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본다.
<사진설명>조성제 부산상의 회장(좌측)으로부터 특별공로상 메달을 받고 있는 왕상은 회장

<사진설명>대한상의에서 특별공로상을 수여 받고 가족 및 지인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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