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24-04-24 12:03 (수)
해양업계의 거목 이맹기회장은 누구인가
해양업계의 거목 이맹기회장은 누구인가
  • 鄭 雄默
  • 승인 2004.12.10 02: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적선 우선이용 정책 입안의 주역
LNG 운송권, 국적선으로 전환시켜
국내건조선 국책화물부여 단독반대
“해운경영인 국가관 투철”무엇보다 강조
12일 발인일이 대한해운 창립 36주년 맞아/

故 이 맹기회장은 해양업계의 대부이면서 바다발전을 위해 해양수산부를 창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순수해운경영인으로 여생을 마감했다.

일제시대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나와 중국으로 건너가 6년제 중학교 등을 졸업하고 해방 후 귀국한 이 맹기회장은 한마디로 국가관이 투철한 가운데 일평생 바다발전을 위해 생활해 온 인물이다.

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62년 해군참모총장직에 오르기 까지 고 이 회장은 부하를 아끼는데 남달랐다.

부하 통솔은 탁월했으며 항상 그를 따르는 부하를 보면 “나는 당신을 보면 항상 기분이 좋아”라는 말로 부하의 호감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역경의 군 생활을 마치고 국영 국적외항해운선사인 대한해운공사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그의 화려한 해운경영의 길을 맞이하게 된다.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직책에서 곧바로 사장에 취임하면서 실천에 옮긴 것은 스스로 출근하기전에 거울을보고 100번 절하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에 한발 더나아가 이회장은 '사훈을 정직하고 성실한 상인이 되자'로 정하고 이를 실행하는데 노력했다.
당시 과장직책으로 고인을 모셨던 박종규 행정규제개혁위원회 위원장은 어떤사유로 이 같은 사훈을 마련한 것에 대해 임직원이 의아해 한다는 질문을 던지자 고인은 "그것은 바로 국영회사 사장인 내 스스로 이를 지키기 위해 만든 표어"라고 강조했다고 회고 했다.
대한해운공사는 영업을 안해도 선복이 없서서 수출입물량을 수송하지 못했던 그시절 상황임에도 불구, 서비스경영 철학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조선공업육성법 입법과정에서 고인은 최고위원의 자격으로 ‘국내서 조선소서 외국선을 건조할 경우 국책화물을 외국선사에게 제공하자’는 내용을 철저하고 전면적으로 반대하여 아예 이 조항을 삭제토록 하는데 성공한 인물이다.

당시 입법위원들은 수출이 무엇보다 중요함으로 국책화물 운송권을 외국선사에 제공해서라도 국내에서의 수출선 건조를 유치해야한다는데 모두가 찬성했으나 고인만 이를 적극 반대하여 성사시킨 것은 오늘의 한국해운발전의 시발점이 됐다.

그 후 이 같은 고인의 집념은 국적외항선이 없을 경우에 한정하여 외국선이 국내 입출항하는 화물을 싣도록 한정하는 국적선국내화물 우선적취제도라는 웨이버제도를 재 도입케 하는 초석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기 까지 해운업발전의 화두가 되고 있다.

정부의 10대 대형선사 육성 정책에 이어 해운산업통폐합정책 추진에 있어서도 “해운업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국책사업으로 민간경제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어 외항해운업 최고 경영인은 어느 기업인보다 국가관을 투철히 하여 기업인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된다.”고 강조했고 이를 솔선수범해온 사실을 해운인 모두로부터 인지되고 있다.

노태우대통령시절 사공일 경제수석을 만나 외국선에 의해 비싼 운임으로 운성해오 던 액화천연가스(LNG)를 처음으로 국적선에 의해 수송토록 함으로써 서민경제의 연료난을 일시에 해결한 것은 물론 외항해운업이 발전하지 않고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사명감으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업계의 현안타개에 최선을 다해 온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아울러 여러부처로 분산된 해사행정을 일원화여 미래지향적인 바다정책을 총괄하는 부의 설치가 절실하다는 뜻을 두어 사재를 들여 여론 수렴에 따른 각종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의 노력으로 오늘의 해양수산부를 창설토록 한 장본인기도 하다.

이 같은 일을 해온 이 회장의 타계 소식을 접한 외항해운업계 등 해양업계는 ‘큰 별이 떨어 졌다’고 크게 아쉬워하며 어떻게 갑자기 유명을 달리했는지 모르겠다고 비통해 했다.

고 이 회장은 최근 첫손녀의 결혼식을 보았고 대한해운의 외국인 경영참여에 따른 방어지분를 확보토록 하는 일 등을 결정하는 한편 타게한 9일에도 회사에 정상 출근, 여느때와 같이 오찬을 옛 동료들과 나눈뒤 인사동 일대를 산책하다 스러져 곧바로 강북 삼성병원으로 옮겼으나 오후 4시30경 끝내 운명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2일 고인 발인일이 공교롭게도 대한해운 36주년 창립일로 이어져 일련의 상황을 알게된 그를 알고 존경하는 해양인들과 지인들은 역시 무인다운 여생을 마무리했다며 그의 타계를 더욱 아쉬워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